Ayden's journal

수준에 맞는 독서와 <악몽을 파는 가게>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널리 공감되는 식자재를 대상으로 한정한다면, 다행히 나는 딱히 그 종류를 가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호불호는 존재하겠지만 ─ 가령 해산물보다는 네 발 짐승, 끓이는 것보다는 구워먹는 것을 선호하는 등 ─ 누가 사줄테니 나오라고 하면 군소리 없이 옷을 챙겨입을 것이다. 파인애플 피자도, 민트초코도 베리 웰컴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조금 달랐다. 재료의 종류를 가리지는 않았지만, 당시에는 재료의 '부위'를 가리는 편이었다. 삼겹살은 먹지만 돼지 머리는 먹지 않는다는 식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배추김치를 먹을 때 줄기 부분만 먹고 잎 부분은 절대 손대지 않았다. 배추김치라면 응당 그런 수준의 아삭함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파리는 죄악이었다. 반찬통의 김치가 이파리만 남아갈 때마다 어머니는 보통의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가리지 말고 골고루 먹으라" 하셨지만, ─ 부끄럽게도 ─ 나는 지금도 부모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언젠가 나이가 차면 줄기만 먹지 않고 이파리도 먹게 될 거라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나는 그럴리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환경적인 변화 없이 그저 나이가 든다고 식성이나 입맛이 바뀐다고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어머니가 옳았고 내가 틀렸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저 나이가 드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서 휘청거리는 내 삶의 궤적이 곧 환경적인 변화 그 자체였다. 이제 나는 이파리와 줄기를 가리지 않고 그냥 배추김치로서 먹고 있다.

 

스티븐 킹도 마찬가지다. 감사하게도 나는 이 책을 황금가지로부터 19년도 쯤에 받게 되었다. 받자마자 펼쳐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덮었다. 당시에 나는 이 책이 너무 구리다고 생각했다.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뭐 이런 걸 단편이랍씨고 출판까지 했으려나' 하는 생각이었다. 명확하게 떨어지는 맛이 없이 모든 게 흐지부지 넘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후로 이 책은 책장 제일 높은 곳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올해 목표를 '이제 새로운 책을 사는 걸 잠시 멈추고, 사놓고 안 읽은 책을 해치우자'로 정한 이래로 내 책장에서는 빠르게 책이 줄었다. 읽은 책들은 대부분 알라딘으로 넘어갔다. 남은 책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의 차례가 와버린 것이다. 이전에 내린 평가를 기억하기 때문에 새 책인 채로 중고서점에 넘길까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아깝다. 눈 딱 감고 첫 페이지를 넘겼다.

 

일기 비슷한 걸 확인해보니 이 책을 받고 읽고 덮은 게 3년하고도 5개월 정도 전의 일이었다. 사회의 속도로는 그렇게 오래 전이 아니지만 ─ 고작 3년 반? 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 군대를 두 번 다녀오고도 남는다 생각하니 어쩐지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길고도 짧은 기간 사이에 내 평가는 극명하게 달라졌다. 이 단편집은 훌륭하다. 모든 단편이 가능한 방향으로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별로라고 생각한 단편조차도 나름의 맛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1권의 중반부에 있는 <모래 언덕>이다. 이 단편은 오래전 읽었던 다른 단편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새벽의 풍경>이라는 작품이었고, 지금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황금가지가 운영하는 BritG라는 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 단편을 읽고 나는 너클볼러에 대한 생각을 했다. 직구인 줄 알았지만, 커브처럼 떨어지는데,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곳으로 빨려들어가는. 아쉽게도 단편은 사라졌지만, 그 단편에 달았던 너클볼러에 대한 짧은 리뷰는 아직 남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너클볼러 이론의 핵심은 공이 어디에 도착하는지 독자가 예상할 수 없게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곧 작가가 작품을 놓고 독자를 상대로 정보의 비대칭 속에서 일종의 게임을 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정보의 완급 조절이라는 부분에서 이 결론은 틀리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핵심을 드러내는 데에는 실패한 것 같다. 이런 류의 단편에서 작가가 견지해야 할 태도는 단순하지만 쉽지 않다. 바로 '독자가 결말을 모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결말을 안다고 생각하게' 해야하는 것이다.

나는 <모래 언덕> 절반 정도에서 결말을 예상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결말에 대한 내 예상은 타율이 꽤 좋은 편이다. 하지만 스티븐 킹은 "좁고 창백한 얼굴이 활짝 웃는 해골처럼 변하는 끔찍한 미소"를 내게 지어줄 뿐이었다. 한방 먹었다는 생각 뿐이었다. 불쾌하지 않고, 아주 만족스러운 한방이었다.

정치에 관한 유명한 격언 중에 '모든 국가는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는 말이 있다. 나는 스티븐 킹의 <악몽을 파는 가게>를 읽는 내내 '어떤 글은 그 수준에 맞는 독자를 고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이 술술 읽히지 않는다면, 가끔은 그 글이 정말 수준 미달의 나무 학살자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내가 그 수준에 못 미치는 멍청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수 년이 지나서 다시 펼쳐보면 그때는 또 다르게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끝이 '전혀 성장하지 않았어' 엔딩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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