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yden's journal

미니멀리즘 라이프 스타일

사실 단순히 '미니멀리즘'이라고만 말하면 이는 디자인 사조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바우하우스가 주창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말도 결국 미니멀리즘으로 흘러가니까. 독일에서 태어난 LAMY가 이런 영향을 받아 바우하우스 맛이 훌륭하긴 하지만, 이번 잡생각에서는 그런 LAMY 2000 같은 소리를 하려 하는 건 아니다.

올해 목표를 미니멀리즘 라이프 스타일로 정한 이후로 꼬박 8개월이 흘렀다. 전체의 2/3 정도가 지나가버린 것이다. 지금껏 안 쓰는 것들을 처분하고 이러쿵저러쿵 일이 많았지만 정작 '미니멀 라이프'가 뭔지, 내가 잘 하고 있는 건지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냥 안 쓰는 물건 버리고 안 쓸 것 같은 물건 안 사는 게 미니멀 라이프일까? 그렇다면 법정 스님이야말로 이 분야의 지존이라 할 것이다.

 

실재 '미니멀 라이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추구하는 '미니멀 라이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편이 더 건설적이지 싶다. 이는 결국 내가 올 한 해 동안 무엇을 이루고 싶어하는지와 직결되니 말이다. 아마도 나는 정리정돈이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작년에 새로운 책상을 구하면서(DESKER 사의 모션 데스크인데 아주 잘 쓰고 있다) 기존 책상을 처분하게 되었다. 문제는 기존 책상에 딸려있던 서랍장과 책장도 함께 처분했는데, 덕분에 그 안에 두었던 물건들이 갈 곳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한동안 이런 책들과 물건들을 방바닥에 두고 살았다.

이건 그냥 우리집 전통 비스무리한 무언가인데, 해가 바뀌기 전에 묵은 것들을 모두 해결하고 신년을 맞이해야 한다. 만약 묵은 감정이 있다면 풀어야 하고, 묵은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야 한다. 묵은 감정은 딱히 없었지만 문제는 물리적으로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남아있던 책장에 이것저것 다 때려박았다. 책은 한 칸에 두 줄로 꽂아넣은 건 물론이고, 빈 칸이 보이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쑤셔넣었다. 덕분에 일단 바닥은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과포화 상태의 책장은 신년의 문제로 취급하기로 했다.

 

 

과포화 상태의 책장은 크게 두 가지 문제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하나는 '미친놈이 책을 사놓고 야발 읽지를 않는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엥간하면 안 쓸 물건인데 앞으로 언젠가 분명히 한 번은 쓸 일이 있을 것이다' 해서 도통 버리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두 문제는 결이 다르기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야 했다.

 

안 쓸 물건을 처분하는 일은 우선 무엇이 '안 쓸 물건'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한다. 내 경우는 그것부터가 골칫거리였다. 어떤 물건은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것을 '안 쓸 물건'으로 분류하는 데에는 큰 저항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물건은 사용하지 않아도 선물 받은 것이었고, 또 어떤 물건은 구매한지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이들을 '안 쓸 물건'으로 분류하는 일은 심리적 저항이 굉장하여 이성의 힘만으로 도무지 해결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물건으로부터 정을 떼야 했고, 이는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였다. 나는 조바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수시로 (물건의 짬통이 되어버린) 책장을 정리하면서 자문했다. 이걸 버리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1월에는 대부분의 물건에 이유가 명확했다. 4월쯤 되니까 그 이유가 서서히 빈약해지기 시작했다. 6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물건 버리기가 시작되었다. 이전까지는 물건의 가치를 가늠할 때 '살면서 언젠가 한 번은 꼭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부분에 중점을 두었다. 지금은 버리고 필요할 때 다시 사도 괜찮은지를 생각한다.

가령 내가 즐기는 카드 게임으로 예시를 들면 이렇다. 가지고 있을 때는 별 가치가 없는데, 구매해야 할 때는 장당 400원인 카드가 아주 많다. 이 카드들은 당장 쓰지도 않고 아마 앞으로도 쓸 일이 없을 테지만, 새로운 확장팩이 출시되면 필요해질 수도 있다. 어쩌면 다른 카드와의 콤보가 발견되어 가격이 꽤 오를지도 모른다. 그럼 당장 쓰지 않는 이 카드뭉치를 필요해질 지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언제까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걸까? 그냥 싹 버리고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카드만 조금씩 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이미 버린 것들이 많은데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 중에 필요해진 카드나 물건이 없다. 앞으로도 없기를 바란다.

 

종이책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어느 시점부터 종이책을 대신해 전자책 위주로 구매하기는 했지만, 그 전에 사둔 종이책이 안 읽은 채로 방치된 채 한가득이었다. 가지고 있는 책의 총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버리거나 중고 서점에 넘기는 수 밖에 없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책을 읽어야만 했다. 펼쳐보지도 않은 새 책을 중고 서점에 넘기는 건 내 지갑이 용납하지 않는 일이니까.

빨리 처리하려면 빨리 읽어야 하는데, 나는 속독에 영 자신이 없다. 그래서 대신 틈틈히 자주 읽기로 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출퇴근 시간을 활용하여 읽었고, 백수가 된 다음에는 생각날 때마다 읽었다. 덕분에 한 달에 못 해도 10권씩 읽으며 지금까지 100여권의 책을 처분할 수 있었다. 아직 남은 책이 적지 않지만, 이 기세라면 올 해가 가기 전에 모두 해치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 일의 진척도를 짬통이 된 책장의 빈칸으로 가늠하는데, 8월 현재는 전체 12칸 중 3칸이 비어있다. 올해 안으로 책을 열심히 읽고 필요 없는 물건에 열심히 정을 떼다보면 두 칸 정도는 더 비울 수 있을거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책장을 비우는 과정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내가 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을 '미니멀리즘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분명 나는 물리적인 책의 개수를 줄여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적지 않은 수의 전자책을 사들이고 있다. 당장 8월에만 해도 벌써 25권 정도를 구매했다. 또, 이 전자책들을 읽기 위해서 리디 페이퍼 4를 구매했다. 조만간 리디 페이퍼 4를 적절한 높이에서 읽을 수 있는 스탠드와 페이지를 넘기기 위한 리모컨도 구매할 예정이다.

일기장으로 쓰기 위해 미리 왕창 사둔 노트를 주변 사람들에게 괜찮은 값에 넘겼다. 그러나 필요할 때마다 일기장을 뽑아 쓰겠다는 생각으로 6공 바인더와 6공 펀치를 샀다. 안 쓰는 만년필을 대거 정리했지만, 저렴하면서도 훌륭한 품질의 중국제 만년필 두 자루를 직구했다. 거의 새 것과 다름 없는 이로시즈쿠 컬렉션을 비롯해 먼지 쌓여가는 잉크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감도 안 잡힌다. 커맨더 덱(카드 게임)을 일곱 개 정도 팔았지만, 여전히 열네 개 정도의 덱이 있고, 원한다면 (혹은 돈을 조금 더 쓴다면) 하나를 더 짤 수 있다.

 

미니멀 라이프라는 게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하고 있는 게 그거랑은 영 동떨어져있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따지자면 이건 미니멀 맥시멀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 비효휼의 문제가 아닐까? 나는 비효율적인 것들을 처분하고 (부동산을 덜 차지하는) 효율적인 새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 시스템의 효율성은 책장의 빈칸으로 증명되고 있다.

 

이것이 내가 친구들에게 "난 요즘 미니멀리즘 라이프를 지향하고 있어"라고 말할 때, '미니멀리즘'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면서 하는 개인적인 고민이다. 이걸 굳이 풀어 설명해주기에는 너무 귀찮기에, 여기에 한 번 쓰고 땡이다.

블로그의 정보

Ayden's journal

Beard Weard Ayden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