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라는 이름의 지도와 그 축척에 대하여
이 책은 한국에서 <대항해시대 최초의 정복자들>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원제는 <정복자들 : 포르투갈은 어떻게 첫 전지구급 제국을 건설하였는가>이다. 그런 만큼 대항해시대의 전반적인 흐름을 그려내는 것이 아닌, 1497년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원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전설적인 제독이자 인도 총독인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의 죽음까지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왜 포르투갈은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극한의 바닷길을 개척할 수 밖에 없었는가. 그건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시장 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의 하나였던 향신료는 인도∙중국 등 아시아에서 생산되어, 무슬림 상인에 의해 운반되고, 이탈리아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넘어왔다. 현대라고 다를 바 없지만 중간 유통업자가 늘어나면 최종 소비자 가격도 비례하여 올라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 대륙 끝에 붙어있는 포르투갈이 아시아와 거래를 틀기 위해서는 바닷길 뿐이었다. 그리하여 국가적으로 해양 탐사에 투자했고, 이러한 시류에 맞물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선장들이 포르투갈에서 나타나게 된다. 앞서 언급한 바스쿠 다 가마와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 페르난디드 마젤란 등이 이때 등장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책이라는 이름의 지도와 그 축적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오늘날의 디지털 지도는 그 축척을 마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지만,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모든 지도의 축척은 고정되어있었다. 지도는 인쇄되었으며 그 축척은 지도의 목적에 따라 결정되었다. 전국교통 도로지도의 경우에는 그 축척 비율이 아주 컸으며, 세계 전도는 축적 비율이 아주 작았다.
주로 역사서에 한정되는 말이겠지만, 책도 비슷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역사 교과서에서도 2차 세계 대전을 다루고 제3제국사에서도 2차 세계 대전을 다룬다. 당연하게도 후자의 책이 훨씬 더 심도있게 해당 사건을 다루는데, 이는 책의 목적에 따라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교과서는 인류사의 커다란 흐름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데 목적이 있지만, 제3제국사는 2차 세계 대전을 촉발시킨 히틀러와 그가 일으킨 제3제국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그 목적이니까.
대항해시대라는 사건에 대한 축척도 그렇다. 이전까지 나는 대항해시대라는 사건에 대해 아주 작은 축척 비율을 가지고 있었다.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했으며,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갔고, 마젤란이 지구를 거의 횡단했다는 정도랄까.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해당 사건을 이루는 것들에 대해 아주 큰 축척 비율로 된 지도를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스쿠 다 가마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에 미리 호 학살 사건을 일으킨 잔혹한 사람이라는 것이나, 포르투갈이 인도에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전투가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그 과정에서 뛰어난 대포와 같이 발전된 무기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책이 영화와 같은 영상 매체와 구분되는 지점일 지도 모른다. 어떤 사건에 대해 다른 각도로 조명하는 영상 매체는 종종 있지만, 어떤 사건에 대해 다른 축척을 갖는 영상 매체는 아직 없거나 부족하다고 느낀다. 아마도 하나의 완성된 결과물을 제작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과, 필요한 인력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초장편 전기는 오펜하이머라는 사건을 아주 큰 축척 비율로 다루었지만, 작가는 ─ 물론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겠지만 ─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 두 사람 뿐이니 말이다.
일본 예능의 한 장면에서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공부란 '머리속에 지식을 쑤셔넣는 행위' 가 아니라 '세상의 해상도를 올리는 행위' 라고 생각한다." 독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떻게보면 축척이란 그 자체로 해상도이다. A4 한 장에 대한민국 전도를 인쇄하면, 같은 용지에 인쇄된 군포시 지도보다 '당정동'에 대한 해상도가 떨어질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해상도와 축척이 다른 점도 분명히 있다. 커다란 숲에서 특정한 나무가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숲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야 한다. 어떻게 바이마르 공화국이 히틀러를 낳았고, 제3제국이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따라서 나는 반드시 큰 축척 비율의 책만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군포시 지도만 가지고는 군포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고, 대한민국 전도 만으로는 당정동이 어디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큰 축척 비율의 책과 작은 축척 비율의 책 모두 필요하고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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