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회랑과 한국 사회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9월 23일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이 책을 읽기 시작하여 10월 17일에 다 읽었다. 그 사이에 공저자 두 분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시게 되어, 나는 졸지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저작을 읽게된 꼴이 되었다. 누가 상 받았다고 책 찾아 읽는 사람이 아닌지라 그냥 재미있는 해프닝이다 싶었다. 이 책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라고는 고작 그 정도에 불과했다. 적어도 12월 3일까지는 말이다.
<총, 균, 쇠>의 저자 제래드 다이아몬드는 인종의 차이가 아니라 환경적 요인과 지리적 조건이 인류 문명의 발전을 결정짓는 주요한 요소라고 주장했다. 그는 농업, 가축화, 기술, 정치 조직의 발달이 특정 지역에서 더 유리하게 이루어진 이유를 설명하며, 이를 통해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과정을 분석한다.
하지만 그의 논리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존재한다. 가령 한국과 북한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이 두 나라의 오늘날이 이토록 극명하게 다른 이유를 환경적 요인과 지리적 조건 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좁은 회랑>의 저자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이러한 사례를 설명하기 위해 제도적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사회의 발전과 쇠퇴를 결정짓는 데 있어 제도와 정치적 권력의 배분 방식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은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의 출현으로 만인의 투쟁이 억제되고 인간 개개인이 '목표'를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홉스는 리바이어던이 가진 속성을 단편적으로 기술했을 뿐이며, 만인의 투쟁이 억제된다고 사회가 반드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리바이어던에게는 여러 모습이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사회의 힘과 국가의 힘이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지에 따라 크게 세 가지 모습으로 리바이어던을 분류하고 있다.
- 부재하는 리바이어던 : 사회의 규범이 국가 권력을 압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속하는 여러 나라 중 인도의 경우에는 '카스트 제도'라는 사회의 규범이 '카스트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면 안된다'는 국가의 법을 압도한다. 더 심하면 규범에 따라 국가의 법이 결정된다. 여자는 운전할 수 없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법은 이슬람이라는 사회의 규범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사회는 대체로 사회적 이동성이 결여되어있다. 여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운전할 수 없으며, 수드라는 어떠한 경우에도 브라만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제약으로 인해 개인은 노력을 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하며, 이로 인해 사회는 발전하지 못한다. 이것이 부재하는 리바이어던의 가장 큰 문제이다. - 독재적 리바이어던 : 중국이나 6.25 전쟁 이후의 한국이 여기에 속한다. 모든 것을 개인 혹은 특정한 집단이 결정하며, 리바이어던은 이들을 위해 봉사한다. 누군가는 싱가폴의 예시를 들며 '훌륭한 독재자가 있으면 국가와 경제는 발전한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오류가 존재한다.
우선 독재자가 훌륭할지 아닐지는 닥치기 전까지 누구도 알 수 없으며, 지금의 독재자가 훌륭하다고 해서 그가 앞으로도 훌륭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독재적 리바이어던 하에서 모든 과업은 독재자로부터 나오며, 국가의 모든 힘을 과업 수행을 위해 쏟아붇고, 창의적인 활동을 할 여지를 줄인다. 이는 중국의 제사해 운동과 토법고로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창의적인 활동과 자유로운 사고가 억압되면, 장기적으로 국가의 혁신과 발전 가능성이 줄어든다. 독재자는 개인의 이익이나 정치적 목적을 우선시하며 정책을 추진할 수 있고, 이는 잘못된 방향으로 국가를 이끌 가능성을 증가시킨다. 따라서 독재적 리바이어던은 단기적으로는 국가의 안정과 성장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불만, 그리고 시스템의 경직성을 초래해 국가의 몰락을 야기할 수 있다. - 족쇄 찬 리바이어던 : 리바이어던의 지배에 저항하지 않되, 리바이어던의 힘이 사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족쇄를 채워 관리하고 감시해야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이를 두고 "국가의 힘과 사회의 힘이 가위처럼 작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사회에서 국가는 강력한 법과 제도를 통해 질서를 유지하고 공공의 이익을 증진하지만, 동시에 시민 사회와 다양한 이해관계 집단이 국가의 권력을 견제하며 균형을 유지한다.
이러한 균형은 국가와 시민이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협력하면서도, 서로를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을 때 가능하다. 예컨대,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독립된 사법부, 언론의 자유, 시민 단체의 활동 등은 리바이어던에 족쇄를 채우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국가가 시민의 복지와 권리를 보호하도록 유도한다.
족쇄 찬 리바이어던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때, 사회는 안정과 발전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스웨덴이나 덴마크와 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강력한 복지국가 모델과 민주적 통제를 결합하여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국가가 강력한 법 집행력과 효율적인 행정력을 발휘하지만, 시민들은 정치 참여와 자유로운 비판을 통해 국가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좁은 회랑은 족쇄 찬 리바이어던이 등장할 수 있는, 국가와 사회의 힘이 알맞은 균형을 이루는 공간이다. 국가의 힘이 더 강해지거나 사회의 힘이 더 강해지면 이 균형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고, 리바이어던은 언제든 족쇄를 풀고서 독재적 리바이어던이나 부재하는 리바이어던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좁은 회랑은 목적지라기보다는 국가와 사회가 함께 그리고 영원히 머물며 걸어가야 할 길이다.
그리고 지난 2024년 12월 3일, 한국 사회는 이러한 균형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리려는 시도와 맞닥트렸다. 윤석열 대통령은 기습적으로 계엄을 선포하며 국회를 봉쇄하였지만, 시민 사회의 힘이 이를 무력화 시켰다. 다행히도 탄핵 소추안이 통과된 오늘까지도 아직 한국 사회는 좁은 회랑 안에 있다.
앞으로도 내가 속한 사회가 좁은 회랑 안에 있을 수 있도록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감시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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